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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문화

진주 봉명산 다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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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효암 작성일13-08-16 14:43 조회2,5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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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솔사 법당 뒤 차밭


소나무가 아름다운 입구길



다솔사의 가운뎃마당. 적멸보궁과 대양루가 마주보고 섰고, 응진전과 극락전, 승방이 좌우에 서서 바른 네모꼴의 마당을 이룬다.


         봉명산 다솔사
소나무와 차밭의 시린 기운에 헐떡이는 마음을 잠재우다 송도(松濤). 글자 그대로 새기면 소나무가 일으키는 물결이라는 말이겠는데, 실은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를 일컫습니다. 차인(茶人)들은 찻물 끓는 소리를 표현할 때 이 말을 씁니다.
솔바람 소리는 달리 송뢰(松?賴)라고도 합니다. 퉁소 소리도 이와 흡사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러고 보니 퉁소 소리에는 소리의 근원인 바람의 원형질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송도든 송뢰든 솔바람 소리를 일컫기는 한데, 찻물 끓는 소리와 퉁소 소리간의 유사성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말의 공통적 속성은 그 말을 만든, 혹은 쓰는 사람들의 의지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일상에서 우리는 자연스럽다는 말을 어색하지 않거나 꾸미지 않은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순일(純一), 무잡(無雜), 무사(無邪)의 의미로도 씁니다.

엄마 젖에 주린 아이가 우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상대로부터 상처받은 사람이 우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는,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금방 아니라는 결론에 닿습니다. 자연은 어떠한 경우든 스스로 상처받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바람이 솔가지를 꺾고 눈이 소나무의 허리를 동강내어도 바람과 소나무, 눈과 소나무는 상처를 주고받은 일이 없습니다. 사람이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우는 것은 그 원인이 심리적인 것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자연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자존심과 사회적 불평등 관계가 개입돼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이 폐기되지 않는 한―이 말을 한 프로타고라스가 소피스트를 자칭한 최초의 사람이었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인간사의 비극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 민족, 국가마다 다른 자[尺]를 갖고 사니까요. 사람 사이의 다툼, 민족·국가 간의 분쟁이나 전쟁의 원인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습니까. 인류 역사상 수많았던 인종청소도, 최근 미국의 이라크 침공도 자신들이 가진 자의 정당성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척도는 자연이어야 합니다. 인지와 문명의 발달도 자연을 거스르는 한 비극적 파국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모든 인간이, 자연에 비추어 어긋남이 없는 상태를 자기완성의 궁극처로 삼는 날, 우리는 비로소 ‘평화’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솔바람 소리를 듣고 차맛을 느껴보아야
솔바람 소리를 말하다가 엉뚱한 곳으로 에두르고 말았습니다만, 다솔사(多率寺)에서 솔바람 소리를 듣지 않고 차맛을 느끼지 않으면, 가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차인들에게 다솔사는 茶率寺이기도 합니다. 그 내력에 대해 살피기에 앞서 절의 역사부터 간단히 더듬어 보겠습니다.

그 후 636년(선덕여왕 5)에 다솔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676(문무왕 16)에 의상 스님이 영봉사(靈鳳寺)로 고쳤습니다. 이후 신라 말에 도선 스님이 중건하면서 다시 다솔사라고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장군의 자리인 만큼 당연히 (군사들을) 많이 거느리고(多率) 있다는 얘깁니다. 다분히 풍수적인 발상인데, 그렇다면 거느린 군사는 쭉쭉 하늘로 뻗은 소나무를 말하는 것이라는 추정은 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 다솔사 입구 소나무 숲길. 훤칠한 소나무 사이로 부드러우면서도 날렵하게 휘어진다. 언제든 다시 걷고 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숲길이다. 예부터 다솔사에는 소나무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절로 드는 길 양쪽에 도열하듯 서 있는 80년 안팎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해발 408m에 불과한 봉명산을 아주 깊은 산으로 만들어 줍니다. 우람하면서도 적당히 굽은 모양은 노덕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이 소나무들과 함께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먼 길을 달려온 수고의 몇 배는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이 절을 다(茶)솔사로 연상하게 되는 것은 효당 최범술 스님이 1917년 나이 14세에 이곳으로 출가했기 때문입니다. 이 후 효당은 1919년 3·1운동 당시 해인사에서 학인으로 공부할 때 서울에서 내려온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책임을 맡아 대구, 경주, 양산 등지로 배포하였습니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만 15세가 되지 않아 석방되었습니다. 일경으로부터 풀려난 효당은 학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재일조선불교청년회 활동을 하였습니다.

1933년 일본 대정대학 불교학과 졸업 직후 귀국한 효당은 조선불교청년동맹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만해 한용운을 따르는 사람들로 결성된 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에 가담, 항일운동을 전개합니다. 이 무렵 다솔사는 국내 불교계 항일운동의 거점이었고, 후견자였습니다. 당시 효당은 만해의 생활까지 책임졌는데, 만해의 회갑 잔치(1939)를 연 곳도 이곳이었습니다.

김동리의 대표작 ‘등신불’ 소재가 된 절

한편 효당은 1934년부터 다솔사에 초등과정의 광명학원을 세워 인근 농민 자제들을 가르쳤는데, 강의는 소설가 김동리가 주로 맡았다고 합니다. 김동리의 대표 소설인 ‘등신불’은 이렇게 하여 탄생된 것입니다(이상 효당에 관한 얘기는 김광식 선생의 ‘만해와 효당 그리고 다솔사’라는 글에 의존한 것임).

효당이 이곳 다솔사의 차밭을 가꾸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반부터라고 합니다. 예전부터 법당 뒤에 묵은 차밭이 있었는데, 200~300년 된 차나무가 제멋대로 자라는 것을 다듬고, 차 좋다는 절에서 차나무를 구해다 심고 가꾸며 손수 차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1973년에 전통 차 문화를 집대성한 ‘한국의 다도’라는 책을 펴내 한국 다도의 맥을 되살렸습니다. 효당이 이 때 만든 차의 이름은 ‘반야로(般若露)’인데, 아직도 그 후광이 남아 다솔사의 차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반야로(般若露)는 지혜의 이슬이라는 뜻입니다. 차를 마시는 행위가 수양과 관계됨을 알게 하는 이름입니다. 예로부터 차의 이름에 이슬 로(露) 자를 즐겨 붙였습니다. 이는 차나무가 반음(半陰) 반양(半陽)의 상태에서 잘 자라는 특성에서 기인합니다. 차 밭에 큰키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어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죽로(竹露)니 옥로(玉露)니 하는 애칭들의 탄생 배경입니다. 대나무에 맺힌 이슬을 먹고 자라서 죽로가 되는 식이지요. 지금도 3천여 평에 이르는 다솔사 적멸보궁 뒤 비탈진 차밭에는 군데군데 편백나무가 자라고 있고, 야생의 분위기를 잃지 않고 있습니다.

그 오른쪽에는 응진전과 극락전, 그리고 최근 해체 보수를 마친 안심료가 고운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채 다소곳이 앉아 있습니다. 왼쪽에는 승방이 기와를 켜 쌓은 흙담을 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채로운 점은 주불전인 적멸보궁에 와불을 모시고 있다는 점입니다. 통상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습니다. 부처의 진신이 있는 도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다솔사의 적멸보궁에는 열반상을 모셨을까요?
  
본디 다솔사의 주불전은 대웅전이었습니다. 1978년에 대웅전의 삼존불상을 개금할 때 후불탱화에서 108과의 사리가 발견되어 적멸보궁으로 바꾸면서 열반상을 모신 것입니다. 20세기에 조성한 적멸보궁다운 창조적 발상이라 하겠습니다.

오른팔을 베개 삼아 모로 누운 열반상을 볼 때마다 나는 웃음이 나옵니다. 산 사람들도 잠 못 이루는 밤에는 이리 저리 뒹굴다가 열반상의 자세로 잠이 든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인도 여행을 하며 열반상을 봤을 때도 경외감보다는 참 편안하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솔사는 열반상이 아니어도 편안한 절입니다. 소나무와 차밭의 시린 기운이 헐떡거리는 마음의 거친 물살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기 때문입니다.

/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ㆍ동화작가
/ 사진 정정현 부장 rockart@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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