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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문화

수수하고 당당하게 나이들어가는 절 - 완주 화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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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효암 작성일13-08-16 14:41 조회1,921회 댓글0건

본문


절 안마당에서 바라본 하늘


절입구 계곡과 폭포


우화루에서 바라본 모습


하앙 구조인 특이한 극락전


수수하고 당당하게 나이들어가는 절  - 완주 화암사

절 찾아가면서 ‘고즈넉함’이니 ‘소박함’을 느끼겠다는 욕심은 비우고 가라, 고 누군가 충고를 했다.
돌아보면, 과연 그랬다. 명승명찰 찾을 것도 없이 ‘공사중’ 아닌 절을 찾아드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적이 한두 번이던가. ‘첫 마음’ 잃어버린 듯 번잡하고 소란스런 욕심에 차 있는 모습. 그래서 ‘내 기억 속 그 절’은 다시 재회하면 ‘아니 보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가 돼 있기 십상이다.
불명산 자락 화암사花巖寺(완주군 경천면 가천리)를 찾은 건, 그럼에도 다시 한 번 품어본 기대 같은 것이었다. 몇 년 전 그 절을 찾은 적이 있었다. 길가 감나무 가지 끝에 까치밥 두어 개 남아있고 어둠이 급속히 내리는 늦가을 저물 녘이었다. 아무 인적 없는 산길에 들어 제가 내는 바스락 낙엽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기를 거듭하며 드디어 닿은 절은 하지만, 보수중이었다.
퍼런 색 비닐 가림막을 뒤집어쓴 극락전. 보물 제663호.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다는 하앙식 구조로 이름난 목조건물이었다. 보자기 쓴 미인의 얼굴을 끝내 못보고 돌아서는 것처럼 몹시 궁금하고 애석했던 기억이 있다.

때는 이제 초록이 난만한 봄. 그 해 늦가을 호젓하다 못해 무섭게 적막하던 산길은 연둣빛 잎들에 쟁그렁쟁그렁 부딪는 햇빛으로 사뭇 명랑하고 소란하다. 초록과 햇볕이 그물처럼 잘 짜인 그 길은 아무리 길게 놓여있다 해도 사람을 지치지 않게 할 것 같다. 많은 비가 내린 후인지라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시원하다. 오르다 예기치 않은 선물처럼 몇 번이나 폭포를 만난다. 이 길에 초록만 있었으면 무슨 재미일꼬 싶게 물소리가 귓속으로 콸콸 쏟아져 들어온다. 소음이 아닌 ‘소리’가 있는 길을 걸어본 게 얼마 만인가 싶다.
절이 가까워졌다는 표지는 불현듯 나타나는 붉은 색 철제계단이다. 146개라든가, 147개라든가…. 몇 번을 꺾이고 휘어지며 길게 놓여진 계단이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의 느낌을 ‘깨는’ 그 계단을 팍팍하게 오른다.
지난 83년 이 계단이 놓이기 전에는 왼쪽 벼랑 사이 아슬아슬한 길을 타고 ‘간신히’ 오르는 길이었다 한다. 15세기 때 씌어진 ‘화암사 중창비’에도 <바위벼랑의 허리에 너비 한 자 정도의 가느다란 길이 있어 그 벼랑을 타고 들어가면 이 절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한다. 이제 몇 길 폭포까지 가로막고 그 위로 놓여진 흉물스런 철제 계단. 안전함과 편리함이란 명분이 있을 것이나 왠지 ‘반갑지 않은 호의’를 강요받는 것 같다.
벼랑 위에 요새처럼 ‘아무도 모르라고’ 들어앉은 이 절을 뚝딱뚝딱 계단으로 오르는 것은 치러야 할 절차와 예의를 ‘생략’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절에 일주문 천왕문 금강문 같은 게 따로 없는 것은 벼랑 위 좁다란 터에 자리해서였을 수도 있으나 예전에는 벼랑을 오르는 힘든 길이 자연스레 ‘문’의 역할을 했기 때문일 터.
                                                
진입의 의식도 없이 절 앞에 훌쩍 서고 보니 아직 절은 저를 보여주지 않는다. 우화루가 앞을 가로막고 그 옆에 다만 작은 대문이 나 있다. 문턱과 문미에 둥글게 휘어진 나무를 대서 천연스런 아름다움을 이룬 문. 흰 도화지 붙여 개방시간을 써놓았다.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30분까지. 아침저녁으로 삐그덕거리며 대문을 열고 닫는 절이니 정말 ‘집’같은 절이다. 나무 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 대문에 ‘대문 시주기’가 적혀있다. 사람들 이름 몇몇이 책상 위 커닝 페이퍼처럼 사인펜으로 ‘쬐깐헌’ 글씨로 씌어 있다. 이만한 생색내기면 보는 사람도 즐겁다 싶다.
대문 앞에 서도 절의 전모는 보이지 않는다. 벽과 지붕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온갖 선과 면이 대문 안 풍경을 ‘추상적으로’ 채워서 그 안은 여전히 ‘비밀’인 채다. 문을 통해 이 작은 절의 전모가 휑하니 보였더라면 얼마나 심심하고 밋밋했을까. 이 공간을 아기자기하게 숨바꼭질하듯 느껴보라는 뜻 같다.

들어서니 대문 옆에 갈퀴며 빗자루며 지게가 세워져 있다. 마음이 새삼 풀어진다. 굳이 엄숙해지지 않아도 좋을 편안함과 친근함. 절집에 들어서며 처음 마주한 것이 사천왕도 아니고 다른 무엇도 아니고 빗자루라니…. 아침마다 이 마당을 쓸고 일할 누군가의 손과 마음이 느껴진다.
작은 보자기 펼친 것마냥  마당이 있다. 마당뿐 아니라 위를 올려다봐도 하늘이 ‘ㅁ’자다. 절의 건물들이 서로 어깨를 겯듯 네 변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적묵당 극락전 우화루 요사채 할 것 없이 고만고만한 크기로 서로 네 귀를 맞추듯 서 있다.

우화루雨花樓(보물 제662호). 꽃비가 내리는 누각이니 이름만으로도 향기롭다. 우화루는 앞면의 기둥만을 2층으로 하고 뒷면은 축대를 쌓아 세운 공중누각형 건물이다. 이른바 반육축법半陸築法. 앞에서 보면 2층이고 뒤에서 보면 1층이니, 이는 원래의 자연적 지형을 해치지 않고 건물을 들여앉히고자 한 궁구의 소산일 것이다. 앞면은 폐쇄적이지만 뒷면은 마당을 향해, 마주 한 극락전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작은 마당이 작아 보이지 않는 이유다. 마루의 바닥면을 마당의 높이와 일치시킨 것도 두 공간을 자연스레 이어 넓히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안엔 오래된 목탁과 목어가 걸려 있어 우화루에 얹힌 세월을 느끼게 한다. 화려한 단청이 미치지 못할 격을 지니고 수수하게 나이 들어가는 건물이다.

우화루와 마주보고 있는 극락전 단청도 빛 바래서 더욱 애잔하니 곱다. 극락전은 신라시대 1425년에 창건됐으나 임란이후 소실돼 1605년에 다시 지은 건물로 처마를 지탱하기 위해 ‘하앙’이란 부재를 받쳐 놓은 독특한 건축양식을 갖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단 하나의 하앙 구조 건물. 하앙은 기둥 위에 배열된 포작과 서까래 사이에 끼워진 긴 막대기 모양의 부재로, 서까래와 같은 경사로 처마도리와 중도리를 지렛대 형식으로 받치고 있는 공포이다. 일종의 겹서까래 구조인 것. 그렇게 지붕의 하중을 분산시켜 그 위에 서까래를 얹으면 그만큼 처마를 길게 뺄 수 있다. 앞쪽의 하앙은 모두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해 그 모양이 아름답다. 반면 뒤쪽 하앙은 꾸밈없이 뾰족하게 다듬었다. 극락전 안에선 유난히 정교한 아름다움을 지닌 닫집과 조선시대 동종을 볼 수 있다. 밤이면 저절로 울려 스님과 신도들을 깨웠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지는 종이다.

적묵당 마루에 앉아본다. 이무롭게 엉덩이 붙이고 앉기 좋은 마루이다. 손으로 쓸어보고 싶은 나무기둥이다. ‘寂默’이란 글자만 봐도 좋다. 쫓겨 살던 번잡한 일상에 없던 것, 그것은 ‘적묵’이기도 했다. 적묵당 마루에 앉아 보니 이 마당이 더욱 좋다. 네모진 이 공간이 부족함 없이, 채워져 있는 느낌이 든다. 그 마당에 개 한 마리가 ‘상팔자’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게 편안하게 널브러져 졸고 있다. 하지만 공양주보살 말씀. “아이고, 지금 우리 누렁이가 괴로워. 짝이 어느 날 나가버리고 혼자 남아 있응께 지도 사는 것이 괴롭제. 옛날에는 둘이 맨날 싸우더니 인자 싸울 놈이 없응께 힘이 하나도 없구만.” 사람이든 짐승이든 혼자보단 ‘싸울 상대’라도 있어야 힘이 나고 사는 재미가 난다는 말이다.
                                  
적묵당 뒤편에 산신각이 있다. 극락전도 적묵당도 크지 않으니 산신각 역시 그에 걸맞게 작게 만들어 앉혔다. 그 한켠으로 지난 겨울 김장김치 맛있게 익어갔을 장독 묻어둔 자리도 있다. 산신각에서 적묵당 뒤편을 보면 요새 도시 건물들처럼 뒷모습이라고 밋밋하거나 흉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 휘어진 나무들이 구부정하니 서로를 기대고 있는 벽이라든지. 직선의 효율과 긴장과는 거리를 둔 느긋하고 자유로운 곡선의 표정이 느껴진다.
그래, 그런 절집에 가고 싶었다. ‘크기’를 좇을 것 없이 작아도 작지 않은 절, 수수하고 당당하게 잘 나이 들어가는 절. 부디 더 이상 변치 말아라 하는 맘으로 화암사를 내려온다.

가는 길: 버스로 간다면 전주역 앞에서 화암사행 버스 이용, 1시간 정도 소요. 승용차로 간다면 전주(17번 국도)→봉동→고산→경천→용복주유소(오른쪽길)→구제마을 구제슈퍼(왼쪽길)→화암사.
문의: 완주군 경천면사무소(063-261-9102)
주변관광지: 대둔산, 송광사, 위봉사와 위봉산성, 모악산 등.
남신희 기자  miru@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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